수면과 기억력의 과학 (기억 저장 원리, 숙면의 중요성, 일주기 리듬)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정보를 학습하고 기억해야 하는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수면이 기억력과 인지기능에 미치는 결정적인 영향입니다. 가천대 길병원 신경과 박기형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 뇌는 낮에 학습한 내용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칩니다. 이는 단순히 피로를 회복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기억이 뇌에 저장되는 원리와 해마의 역할
기억은 크게 서술기억과 절차기억으로 분류됩니다. 서술기억은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기억으로, 다시 일화기억과 의미기억으로 나뉩니다. 일화기억은 "오늘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가"와 같은 개인적 경험에 관한 것이며, 의미기억은 학습을 통해 얻은 지식을 의미합니다. 반면 절차기억은 자전거 타기나 악기 연주처럼 몸으로 익힌 기술에 관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각 기억 유형은 뇌의 서로 다른 부위에 저장됩니다. 서술기억은 대뇌피질 표면에, 절차기억은 뇌의 깊은 내부에 저장됩니다. 이것이 왜 알츠하이머병 환자는 오늘 아침 식사를 기억하지 못해도 자전거는 탈 수 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파킨슨병 치매 환자의 경우는 정반대로 최근 사건은 기억하지만 자전거 타는 방법을 잊어버립니다.
기억 저장 과정은 부호화, 저장, 인출의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정보가 뇌로 들어가는 것이 부호화이고, 이를 장기기억으로 변환하는 것이 저장이며, 필요할 때 꺼내는 것이 인출입니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해마입니다.
측두엽 안쪽 깊숙이 위치한 해마는 그 모양이 해마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해마는 기억이 들어가는 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1953년 헨리 몰레이슨(HM)이라는 환자의 사례는 해마의 중요성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난치성 뇌전증 치료를 위해 양쪽 해마를 제거한 후, 그는 30분 이상 기억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매달 만나는 의사조차 알아보지 못했지만, 수술 전의 기억들은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해마가 새로운 기억 형성에는 필수적이지만, 이미 형성된 장기기억 저장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해마에서 시작된 기억은 파페츠 회로를 통해 대뇌피질과 연결됩니다. 이 회로가 반복적으로 작동하면서 일시적 기억이 영구적 기억으로 굳어지는 것입니다. 장기강화(long-term potentiation)라 불리는 이 과정에서 신경세포 간 연결이 강화되고 구조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에릭 캔들이 이 메커니즘을 밝혀내 노벨 의학상을 받은 것은 기억 연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수면 중 기억 강화 과정과 숙면의 중요성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집중력과 반응속도가 현저히 떨어집니다. 2003년 일본 신칸센 기관사가 수면무호흡증으로 인해 270km 속도로 달리던 열차의 정거장을 그냥 지나친 사건은 수면 부족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수면무호흡증 환자는 밤에 10초 이상 호흡이 멈추는 현상이 시간당 5회 이상 발생하며, 심한 경우 산소포화도가 50-60%까지 떨어집니다. 뇌는 산소 부족을 감지하고 계속 각성 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깊은 잠을 잘 수 없게 됩니다.
미국에서 66명의 트럭 운전사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는 하루 3시간, 5시간, 7시간, 9시간 수면 그룹으로 나누어 반응속도를 측정했습니다. 수면 시간이 짧을수록 반응속도가 떨어졌고, 더 중요한 것은 이후 정상 수면을 취해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수면 부족 상태에서 익힌 기능은 충분한 수면 상태에서 익힌 기능을 따라잡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운동기억 실험에서 62명의 참가자에게 왼손으로 특정 숫자 조합을 키보드로 입력하도록 훈련시켰습니다. 같은 날 아침과 저녁의 수행 능력은 비슷했지만, 하룻밤을 자고 난 후에는 수행 능력이 급격히 향상되었습니다. 시각기억 실험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17초 동안 화면의 문자를 보여준 후 기억하게 했을 때,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개선이 미미했지만 수면 후에는 기억력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수면은 크게 렘수면(꿈꾸는 수면)과 비렘수면(꿈꾸지 않는 수면)으로 나뉩니다. 잠들 때는 얕은 잠에서 점차 깊은 서파수면으로 들어갔다가 1시간 반에서 2시간 후 렘수면으로 전환됩니다. 이 주기가 하룻밤에 4-5회 반복되며, 서파수면은 초기에, 렘수면은 아침에 가까워질수록 더 많이 나타납니다.
서파수면 동안 나타나는 느린 뇌파와 수면방추(sleep spindle)라 불리는 빠른 뇌파가 기억 강화에 핵심적입니다. 수면방추가 나타날 때 해마는 낮에 학습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재생(replay)합니다. 마치 테이프를 되돌려 듣듯이 기억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이때 서파수면이 대뇌피질로 신호를 보내 해마에서 재생된 정보를 피질에 차곡차곡 저장합니다. 뇌 영상 연구에서도 낮에 길 찾기 훈련을 한 사람들의 해마와 두정엽이 수면 중에도 활성화되는 것이 관찰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수면 환경의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같은 조건에서 단어 100개를 암기시킨 후, 한 그룹은 불을 켜고, 다른 그룹은 불을 끄고 재웠습니다. 다음날 테스트 결과, 불을 끄고 잔 그룹의 성적이 월등히 높았습니다. 불빛이 멜라토닌 분비를 억제해 수면의 질을 떨어뜨렸기 때문입니다. 멜라토닌은 어두워지면 분비되어 "잠자라"는 신호를 보내는 호르몬입니다.
작업기억처럼 일시적으로만 필요한 정보는 대뇌피질에 잠깐 머물다 사라지지만, 장기기억으로 저장하려면 계속 되새겨 해마의 구조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장기강화 현상입니다. 글루타메이트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며 해마 신경세포 간 연결이 강화되지만, 이는 일시적입니다. 그 후 다른 생각을 하면 구조가 원상태로 돌아가버립니다. 따라서 반복 학습으로 연결을 강화한 후 수면을 통해 대뇌피질로 전달해야 비로소 장기기억이 완성됩니다.
커피와 교대근무가 수면과 일주기 리듬에 미치는 영향
커피는 각성제로서 수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아데노신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은 각성 중추를 억제하여 잠을 유도하는데, 커피의 카페인이 아데노신 수용체를 먼저 점유해버리면 아데노신이 작용할 수 없게 됩니다. 문이 막혀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커피의 반감기는 약 8시간입니다. 아침에 마신 커피 한 잔이 반으로 줄어들려면 8시간, 다시 반으로 줄어들려면 또 8시간이 걸립니다. 즉 아침에 커피를 마시면 저녁까지 체내에 4분의 1이 남아있고, 여러 잔을 마시면 밤에도 한 잔 분량이 그대로 남아있게 됩니다. 한 경도인지장애 환자는 하루 12잔의 커피를 마시다가 끊은 후 기억력이 개선되었다는 사례도 있습니다. 커피에는 노화 예방, 치매 예방 등의 긍정적 효과도 있지만, 수면 장애가 있다면 반드시 섭취를 줄여야 합니다.
교대근무자들은 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합니다. 인간의 몸은 일주기 리듬(circadian rhythm)에 따라 작동하는데, 이 주기는 24시간보다 약간 깁니다. 외부 자극이 없으면 수면 시간이 점점 뒤로 밀리게 됩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 식사 시간, 사회적 활동 등이 일주기를 24시간에 맞추는 동조인자(zeitgeber) 역할을 합니다.
교대근무자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일주기가 계속 바뀐다는 점입니다. 2-3일마다 낮밤이 뒤바뀌면 몸은 적응할 시간이 없습니다. 간호사들이 코로나 병동에서 방호복을 입고 낮밤 교대로 근무하거나, 승무원들이 시차가 다른 지역을 오가며 근무하는 것은 신체적으로 매우 큰 부담입니다.
교대근무자가 낮에 잘 때는 밤과 최대한 유사한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암막 커튼으로 방을 완전히 어둡게 하고, 필요하다면 멜라토닌 보충제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밤 근무 시에는 광치료(light therapy)로 밝은 빛을 쪼여 몸이 낮이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습니다. 수면 시간은 본인이 밤에 자는 시간만큼 확보하되, 환경 조성이 관건입니다. 주변 가족의 협조도 필수적입니다.
일주기 리듬의 교란은 단순히 피로감을 넘어 장기적으로 대사질환, 심혈관질환, 심지어 치매 위험까지 높일 수 있습니다. 수면 중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이 뇌 밖으로 배출되는데, 수면이 불규칙하면 이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알츠하이머병 위험이 증가합니다. 교대근무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되, 최대한 규칙적인 패턴을 유지하고 휴무일에는 충분한 회복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면 시간 자체도 중요하지만, 개인차를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4-6시간 자도 낮에 졸리지 않고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억지로 수면 시간을 늘릴 필요는 없습니다. 수면제 사용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은 "낮 시간의 기능 저하"입니다. 밤에 잠 못 자는 시간이 괴롭다는 이유만으로 수면제를 복용할 필요는 없지만, 낮에 집중력 저하, 기억력 감